이정하 시인의 시들은 담담하다. 과장도 없고 느끼하지도 않다. 요리로 치면 담백한 맛이다. 화학 조미료는 적게 들어가고, 자극적인 맛도 없는데 심심하지도 않다. 요즘 시처럼 말장난도 아니고, 감성시인이랍시고 중2병 스럽지도 않다. 어려운 말로 비비 꼬는 경우도 없다. 잔잔한 마음에 돌을 던져 동심원이 생기는 것처럼, 일렁이는 듯한 담담한 어구가 마음에 든다.
낮은 곳으로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고여들 네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간판 대신 시 한구절이 쓰이기 시작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시 중 하나다. 후에 POP 하던 사람들이 일으킨 캘리그라피 유행이 커졌을 때, 자주 쓰이던 문구가 '잠겨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였다.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도 유명하다. 진심이 담긴 이런 담백한 시가 좋다.
한번은 옆동네 도서관에서 강의가 있었다. 나는 도서관을 자주 다니기 때문에 가끔 괜찮은 강의가 있는지 둘러보곤 하는데, 이정하 시인의 강의가 있길래 듀티만 확인하고 바로 신청했다. 만약 배우는 것이나 강의 듣는 걸 좋아한다면, 지역 도서관의 프로그램을 눈여겨 보시길. 좋은 기회가 자주 온다. 글쓰기와 첨삭 프로그램, 시 낭독, 교수들의 강의 등 양질의 교육기회가 많다. 시 낭독 하니 그 때가 더 선명히 기억난다.
강의가 주중 오전이었던지라 대부분 연세가 있으신 분들이 많았다. 학생이나 내 또래의 사람들도 몇명 보였다. 시에 관한 강의라서 이정하 시인이 몇 명을 지목해 몇 종류의 시를 읽게 했는데, 읽는 사람마다 목소리가 정말 좋았다. 맨 처음 읽는 아저씨부터 동굴 저음이라 다들 감탄하며 들었는데, 시 낭독을 배워서 그렇다고 했다. 시에 관한 강의라 그랬을까, 그날따라 분위기있는 목소리가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다시 시집으로 돌아와서, 책은 시만 모아놓은 게 아니고, 시 한 편에 이야기 하나씩이다. 시를 쓰게 된 마음, 기분, 배경을 시인의 입으로 들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시의 해석은 다른 사람들이 '이 시인은 몇년도에 태어나서 어떤 인생을 살았고~'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시 자체가 쉬운 언어로 쓰여서 해석이랄 게 딱히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시가 더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라면만으로 세 끼니를 먹으면 질리지만, 집밥은 계속 먹어도 덜 질리는 것처럼. 해설과 사진을 줄이고 시를 더 채우면 좋았을 것 같다.
대체로 시만 있는 시집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기가 어렵고, 생각날 때 한번씩 들춰보게 된다. 그런데 시에 그림과 사진이 많아지면 두꺼워지는 대신 시가 줄어든다. 예전에 어느 보험사였던가, 시 한편씩 캘리그라피로 쓰여진 엽서 세트가 있었다. 또 북퍼퓸이라고 문학작품과 어울리는 향수를 패키지로 파는 경우도 있다. 시를 자주 접하는 데는 전철 스크린도어나 정류장에 써두는 것도 물론 좋지만, 어느정도 적절한 비용을 지불한다는 면에서 굿즈나 편지지 등 다방면으로 상용화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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